브로드웨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은 올해 토니상에서 최우수 신작 뮤지컬을 포함해 6개 부문을 휩쓸었다. 연극·뮤지컬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에서 거둔 이 성과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드라마가 개막될 수 있을지조차 몰랐어요"
구식 헬퍼봇 올리버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대런 크리스는, 제작에도 참여한 입장에서 여러 번 찾아온 역경에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서울에서 뉴욕까지, 그리고 팬데믹
“어쩌면 해피엔딩” 첫 상업 공연은 2016년 서울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일본과 중국에서도 공연이 이어졌다. 그해 말, 뉴욕에서는 배우들이 대본을 보면서 연기하는 영어 낭독공연이 펼쳐졌다. 현장에는 50년 넘게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해온 제프리 리차드(Jeffery Richards)가 있었다. 그는 작품의 "순수한 독창성"에 매료되어 상업 판권을 확보했다.
수석 프로듀서가 된 리차드는 크리에이티브 팀을 꾸리고, 워크숍을 열고, 자금 조달에 나섰다. 마이클 아덴(Michael Arden)은 2018년 연출을 맡으며 "파괴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며, 궁극적으로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리차드에게 보냈다.
뮤지컬 부문 최우수연출상을 수상한 마이클 아덴 감독이 수상연설을 하고 있다
아덴이 연출한 작품은 2020년 초 미국 애틀랜타 얼라이언스 극장에서 초연됐다. 애틀랜타 저널-컨스티튜션은 "눈부시다(dazzling)"고 평했고 , 타임스의 제시 그린 평론가는 "브로드웨이에 딱 맞는" 작품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차드는 다음 시즌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기를 희망했지만, 불행하게도 예상치 못한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다.
극장들이 다시 문을 열 무렵, 기회는 사라져 있었다. 투자자를 기다리는 많은 작품에 우선 순위가 밀렸고, 극장들은 이미 다른 공연으로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리처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회상했다.
위기의 연속, 프리뷰 공연에서 큰 적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 2024년 여름, 수석 프로듀서 제프리 리차드와 헌터 아놀드는 공급망 문제를 이유로 첫 공연을 한 달 연기했다. 중국산 디지털비디오 타일이 들어오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만, 많은 이들은 재정난을 가리기 위한 핑계라고 여겼다.
제작진은 일시적으로 직원을 해고하고, 공연을 취소했다. 판매된 티켓은 한 달에 걸쳐 환불했고, 뮤지컬이 개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틱톡TikTok 인플루언서의 악평과도 싸워야 했다.
올리버 역의 대런 크리스와 함께 무대에 오른, 최신형 로봇 클레어 역의 헬렌 J. 셴(Helen J Shen)은 "사람들이 저에게 동정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결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죠."라고 말했다.
뮤지컬에 자금을 댈 예정이던 일부 투자자들은 “가라앉는 배에 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다”며 떠나기 시작했다.
"틱톡 때문에 많은 투자자를 잃었어요." 수석 프로듀서인 헌터 아놀드가 말했다. "어떤 투자자도 볼 기회조차 장담할 수 없는 쇼에 수표를 쓰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메이비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은 10월 16일 프리뷰 공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티켓 판매액은 45만 달러(약6억원)에 불과했다. 브로드웨이 신작 뮤지컬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
개막하기 전까지 1,600만 달러(약216억원)의 자본금을 모으지 못했고, 프리뷰 공연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주당 수입은 운영비 76만 5천 달러(약10억원)에 훨씬 못 미치는 30만 달러(약4억원)도 안 됐다. 973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은 약 20%가 비어 있었다. 4주 차에 는 평균 티켓 가격이 45달러(약6만원)까지 떨어졌다. 제작진이 좌석을 채우고 입소문을 내기 위해 티켓 가격을 30~69달러로 낮췄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단 네 명의 배우, 그중 두 명이 로봇을 연기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립, 기억, 그리고 사랑을 가슴 뭉클하게 탐구하는 이 작품은 인디 팝, 미국 재즈, 브로드웨이 음악이 어우러지고, 자동화와 영상 기술을 활용한, 천천히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무대이다.
헌터 아놀드는 "'서울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의 나라에 로봇 두 대가 있다'고 설명하면 사람들은 '이건 뮤지컬 같지 않은데'라고 말하곤 했어요"라고 했다.
작품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작품의 내용을 설명할 때 "로봇"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연출가 마이클 아덴 감독은 "여러 면에서 부드럽고 사색적인 작품이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클레어 역의 셴은 “이 작품의 매력은 "그냥 저를 믿으세요"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새로운 색깔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클레어 역의 헬렌 셴이 토니상 수상에 기뻐하고 있다
드디어 입소문, 비평가들의 호평
그러나 공연을 본 관객들은 감동을 받았고,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밀을 공유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아덴은 말했다.
프리뷰 공연을 마치고 11월 12일 개막한 “메이비 해피엔딩”은 비평가들의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다 . 뉴욕 타임스는 "매혹적(ravishing)" 이라고 평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사랑스러운 보석(A darling gem)" 이라며 극찬했다.
뉴욕타임스는 마이클 아덴 감독의 연출에 대해 “숨 막힐 듯한 기교로 연출한 이 작품은 난이도 면에서도 보너스 점수를 받았다. SF적인 기발함 속에 완전히 독창적인 휴먼 하트브레이커(heartbreaker)를 숨겨 넣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올리버 역의 크리스에 대해서는 “이 작품에서 특히 훌륭하며, 놀라운 몸짓 연기, 모든 틱과 글리치(tics and glitches)를 보여주면서도 내면의 진정한 감정을 결코 가리지 않는다. 진부함의 함정은 철저히 피한다”고 썼다.
클레어 역의 셴에 대해서도 “재치있는 소녀가 가진 조바심을 새롭게 찾은 애정의 놀라움과 고통으로 채운다. 크리스처럼 그녀도 신성하게 노래하지만, 그들의 노래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느끼게 한다”고 극찬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넓은 마음과 매혹적인 엇갈림 감성을 지닌, 사랑스럽고 보석 같은 쇼다. 리메이크와 리메이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브로드웨이의 제작 라인 속에서, 이 작품은 혁신의 신선한 모델”이라고 평했다.
반전의 시작, 그리고 매진
하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브로드웨이는 실패가 일상인 산업이고, 공연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일례로 2022년, 미국 데뷔를 준비하는 한국 아이돌의 성장기를 다룬 뮤지컬 "KPOP"은 개막 2주 만에 막을 내렸다.
"우리는 개막 다음 날 아침에 도시를 떠나면서, 공연이 매우 짧을 것 같아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메이비 해피엔딩"을 공동집필한 윌 아론슨의 말이다.
우려는 기우였을까. 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입소문과 호평에 힘입어 제작진은 쇼 홍보를 위해 175만 달러(약24억원)를 추가로 모았다. 헌터 아놀드는 "우리는 그저 점진적으로 성장했을 뿐입니다. 돈이 많이 소모되고 있었죠. 하지만 온라인 여론과 판매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메이비 해피엔딩”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칸 버팔로"에 출연했던 대런 크리스의 합류였다. 뉴욕 드라마비평가상 최우수상을 받은 "아메리칸 버팔로"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발표되는 등 브로드웨이와 헐리웃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대런 크리스의 참여는 극장주와 투자자 모두에게 큰 힘이 됐다.
공연장 문제도 해결했다. 공연 규모는 작지만 세트가 정교해서 바닥 아래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한 무대를 갖춘 극장이 필요했는데, 여러 시즌 동안 마땅한 극장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벨라스코 극장을 구할 수 있었다.
개막 후 일주일 만에 59만 1천 달러(약8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포함된 주에는 처음으로 100만 달러(약13.5억원)를 돌파했다. 이후 대부분의 주에서 수입이 운영비를 초과했다. 5월 초 토니상 후보 발표 이후에는 공연이 사실상 매진됐다.
브로드웨이에서 “메이비 해피엔딩”이 수익을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제작비가 계속 오르면서 뉴욕에서 새로운 뮤지컬이 흑자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세 시즌 동안 "앤 줄리엣"만이 수익을 냈을 뿐이다. 하지만 토니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큰 힘이 될 전망이다. 최고의 뮤지컬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심이 담겨 있고, 독창적이며, 혁신적입니다. 무섭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꾸준히 나아간다면 가장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무대 디자이너 데인 라프리의 말이다.